제가 다녔던 국제학교는 학교 숙제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은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90분짜리 클래스 4개로 이루어진 형태였는데, 많은 선생님께서 다음 수업까지 해와야 하는 숙제를 내주셨고 때때로는 다음 주 혹은 다음 달까지 제출해야 하는 팀 프로젝트와 개별 에세이 등도 많았습니다. 방과 후에는 주기적으로 학교에 남아 동아리 활동 및 농구 훈련을 해야 했고 귀가 후에는 수학학원, 과학학원, TOEFL학원, SAT학원 등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와 겨우겨우 숙제를 마치면 이미 하루가 끝나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하이스쿨에 입학한 후에는 숙제가 훨씬 더 많아졌고, 이 때문에 하이스쿨 초반에는 매일매일 주어진 숙제만 다 끝내도 뿌듯하고 피곤한 마음에 잠자리에 들고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이스쿨 첫 해인 G9까지 제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메이저 의대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유지하는 아주 눈에 띄는 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가 G9일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과목에 압도적으로 뛰어난 한 외국인 여학생이 있어서 저는 수학을 제외하고는 딱히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난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미들스쿨 2년 동안은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미국국제학교에 막 입학해 영어도 서툰 상태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외국생활을 한 지 3년 차가 되던 하이스쿨 첫 해에 '적응'이라는 이유로 낮은 성적을 감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들릴 것이 자명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 때마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고, 심지어는 어릴 적에 들었던 "저학년까지는 수업내용이 쉬우니까 성적이 좋다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계속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의 그 학생이 바로 제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에 휩싸인 적도 많습니다.
이랬던 제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번 글의 제목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수강하게 된 한 종합학원의 한국사 수업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 중 지나가시는 말로 "숙제를 공부라고 착각하지 마라. 숙제하는 시간 외에 따로 학습하는 순공부시간을 확보하라"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이 말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매일매일 학교 숙제를 끝내는 것도 버겁다고 생각하면서 왜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오는지를 고민하고 있던 저에게 '숙제는 공부가 아니다'라는 말은 제가 지금까지 한 노력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을 부정당하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선생님의 말씀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저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하는 말은 일단 듣고 볼 가치가 있다'라는 공부 철학 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 선생님의 말을 일단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의 제 행동을 되돌아보니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 제가 했던 유일한 노력은 수업에 더욱 경청하고 숙제를 더 꼼꼼히 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숙제만 모두 마쳐도 하루가 끝나 있었으니까요. 숙제를 하다 보면 천재가 아닌 이상 못 푸는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풀었지만 틀린 문제도 있고, 정답은 구했지만 왜 그러한 답이 나왔는지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은 문제들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저는 지금까지 단순하게 '숙제 끝 = 해당 내용 학습 완료'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G10에 수강했던 AP생물 수업은 매 수업마다 교과서 한 단원씩 진도를 나갈 정도로 수업 속도가 빨랐고,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께서 수업한 단원에 대한 연습문제를 몇 개 골라 숙제로 풀어오게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각 단원에 포함되어 있는 그 많은 내용을 9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두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같은 강의를 듣더라도 학생 별로 이해하는 정도에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각자 집에 가서 교과서를 다시 읽고 연습문제를 풀면서 헤갈렸던 내용을 복습해보라는 취지로 매번 숙제를 내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AP생물 숙제 외에도 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었기 때문에 교과서를 다시 읽기는커녕 문제의 답만 찾기 위해 특정 단어가 있는 부분만 펴서 읽는다거나 구글에 검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숙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배우겠다는 의지보다는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최단시간에 찾아 적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그 와중에 숙제만 어떻게든 끝내면 스스로 해당 단원을 마스터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숙제를 통해 수업내용을 다 알게 되었다는 제 섣부른 오해와는 달리 생물 시험을 볼때면 60점 70점을 받는 등 제대로 학습을 했다면 받을 수 없는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들을 계속 받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과제를 끝내는데 시간을 적게 들이는 것은 효율성 측면에서 좋은 전략이지만,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 함부로 효율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최상위권에 도달하고 싶은 학생들은 불가피하게 비효율적인 구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이 구간을 극복해야 비로소 최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G10 1학기 당시 한국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지금까지 숙제에 접근했던 방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숙제란 선생님 입장에서는 학생들 개개인이 수업에 얼마나 성실히 참여했는지 보여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이고, 학생들 입장에서 숙제란 자신이 수업내용의 어떤 부분을 제대로 이해했고 어떤 부분은 아직 부족한지 파악하게 도와주어 이후 공부를 할 때 좀 더 뚜렷한 방향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수단입니다. 여기서 '최소한'이라는 부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학생들이 잘하던 못하던 모두를 이끌고 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때문에 선생님은 숙제를 내줄 때 평균 정도의 학생들이 수업을 성실히 들었다면 풀 수 있을 정도의 숙제를 내줄 수밖에 없고, 또 선생님이 생각했을 때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숙제로 내주어 공부를 정말 싫어하는 학생이라도 강제적인 숙제를 통해 최소한 그 핵심 내용만큼은 습득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즉 최상위권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지엽적인 내용과 심화적인 부분들은 숙제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배울 수 없다는 것이죠. 실제로 제가 하이스쿨 때 사용한 Calculus, Physics, Biology 원서의 연습문제들을 보면 basic concept을 묻는 질문부터 수십 분 동안 고민해야 겨우 풀리는 challenging 한 문제들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있는데 선생님들께서는 정작 challenging 한 문제들을 숙제로 내주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학교 숙제는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 모든 학생들이 다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러분이 오늘의 숙제를 모두 마쳤다는 것은 여러분이 느낀 숙제의 주관적인 난이도 및 소비한 시간과는 무관하게 드디어 다른 학생들과 동일선상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들이 하는만큼만 해서는 좋은 성적을 받을 수도, 최상위권으로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상위권을 넘어 최상위권으로 가고 싶은 학생은 숙제를 통해 학습이 덜 된 부분을 파악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공부를 통해 점진적으로 다른 학생들과의 차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숙제에 투자한 시간을 진짜 공부라고 착각하며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자기위로를 한다면 영원히 중위권에 머물 것입니다. 이쯤에서 클리셰 같지만 제가 좋아하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하나 남기겠습니다.
"미친 짓이란, 매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 알베트로 아인슈타인-
다시 AP생물 수업 얘기로 돌아가서, 숙제와 공부를 구분하기 시작한 후로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꼭 개인 시간을 확보해 교과서를 정독하고 단원 뒷부분의 연습문제를 모두 풀었으며 구글에서 심화 문제들을 직접 찾아 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부법들은 이후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처럼 노력한 결과 2학기에는 꾸준히 높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만점인 5점 비율이 5% 밖에 되지 않는 실제 AP생물 시험에서 당당히 5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누군가에겐 AP생물 5점이 당연한 성취일 수 있겠지만 Unit 1 Test에서 60점을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과 G11, G12 선배들 사이에서 항상 제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저에게 이 작은 성공은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심지어 그 해 수업을 함께 들었던 20명의 학생들 중 5점을 받은 학생이 저를 포함해 2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저의 공부 전략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 동시에 제가 하이스쿨 내내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에 달려들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는데 왜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셨던 분들은 오늘 제가 설명드린 제가 숙제와 공부를 바라본 관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와 비슷하게 작은 성공을 하나씩 맛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드스튜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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